회화, 시선의 제안
명명된 겨울 없음展 2.1~ 2.20 라라앤

황용진 <ML17195> 캔버스에 유체 60.6 X 72.7 cm 2017

이수진 <Ghost> 캔버스에 유체 24.2.X 33.4 cm 2020

이수진 <Largo> 캔버스에 유채 22 X 27.3cm 2021
라라앤 개관전 <명명된 겨울 없음>은 황용진과 이수진이 2인전이다. 겨울처럼 고요하고 쓸쓸한 풍경을 담았다.
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
전시 참여자들의 작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때, 그 복합성에 대한 큐레이팅은 전시가 당면한 인력(引力)의 대응 판도를 주요하게 고려하며 재편한다. 그 예로, 라라앤 전시 <명명된 겨울 없음>은 황용진과 이수진 두 작가의 작품을 전시장 입구부터 안쪽까지 벽을 따라 교차로 배치했다. 이는 서로 다른 표현의 대비보다 둘의 유사성을 드러내도록 작동한다. 다시 말해 둘 사이의 대비가 분명하더라도, 관객이 차이를 인지하도록 가속하지 않고 오히려 무신경하도록 유보하면서, 독립적 표현에 대한 작가의 기대를 지연했다. 이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일시적으로 분할/ 나열된 지도, 또는 하나의 맥락이 임의로 해체/ 조직된 인덱스의 방법을 암시한 것이다. 4)
두 세계를 하나의 풍경으로 묶는 전시 구성은 누군가의 예상에 부응했을까, 아니면 대랍했을까.
황용진의 회화가 하나의 이미지에 두 개 이상의 요소를 자제하며 서사의 개입을 배제하려는 설정 5)은, 이수진의 회화와 서로 반응하여 사유의 공간을 넓힐 계기를 마련한다. 전시는 이수진의 회화 또는 황용진의 회화와 마주하게 함으러써 수집한 이미지의 기존 서사와 또 다른 이야기 전개가 일어나도록 6) 분면히 했지만, 영화에서 분할된 장면의 연속이 또다시 오컬트적인 서사를 반복하는 상황과 (그의 예상보다) 일찍 마주한 것은 아닌가 싶다. 황용진은 '주인공이 사라진 무대'를, 이수진은 '무대에서 벗어난 주인공'을 그렸고, <명명된 겨울 없음>은 갤러리의 클리셰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전시라는 광의의 영역에서 회화에 대한 큐레이팅은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언제나 본래적인 미래, '앞선 거기'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자기 세계를 누군가의 삶과 부딪히면서 시간을 흐르게 해야 한다. 우선 현재를 진단하자면, 공간에 대한 관심이 범사회적으로 커졌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도시의 이동 반경이 제한되고, 마스크 때문에 숨쉬기 힘들어진 뉴노멀 일상을 생각한다 7)
이 시기를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지금은 공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변화는, 변해야 하는 시기이다. 회화가 실재하지만 부재하는 역설의 공간으로서 우리에게 또 다른 시선을 제안하는 방법이라면, 공간에 대한 시대적 인식의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는가.
/ 백필균
4)윤원화, [문서는 시간을 재/생상할 수 있는가], 2017 참조.
5) 황용진의 이전 작업이 대위법적인 사물-배경 관계를 화면에서 연출한 설정과 달리, 최근 작업은 회화적 표현에 의한 안식의 풍경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색체 스펙트럼이 좁은 풍경 이미지에서 나무의 잔가지들로 이뤄진 숲의 형상과 공기의 곁을 비정형적 마티에르로 재현한 동시에 회화의 물질과 행위를 현현했다.
6) 이수진은 색조와 구도가 보정되었을 영화 장면을 분할하여 긴장감을 드러내는 회화로 재전유(re-appropriation)했다. 이는 영상 기술로 가공된 이미지를 단순히 일상의 편린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공간'을 향한 창문 하나하나를 열어가는 회화적 실천과 관계있다.
7) 천 명 이상의 학생이 모이는 학교의 구조는 위함하다. 갑자기 집이 좁아 보인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은 고공 행진하는데 집은 언제 사나...
회화, 시선의 제안
명명된 겨울 없음展 2.1~ 2.20 라라앤
황용진 <ML17195> 캔버스에 유체 60.6 X 72.7 cm 2017
이수진 <Ghost> 캔버스에 유체 24.2.X 33.4 cm 2020
이수진 <Largo> 캔버스에 유채 22 X 27.3cm 2021
라라앤 개관전 <명명된 겨울 없음>은 황용진과 이수진이 2인전이다. 겨울처럼 고요하고 쓸쓸한 풍경을 담았다.
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
전시 참여자들의 작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때, 그 복합성에 대한 큐레이팅은 전시가 당면한 인력(引力)의 대응 판도를 주요하게 고려하며 재편한다. 그 예로, 라라앤 전시 <명명된 겨울 없음>은 황용진과 이수진 두 작가의 작품을 전시장 입구부터 안쪽까지 벽을 따라 교차로 배치했다. 이는 서로 다른 표현의 대비보다 둘의 유사성을 드러내도록 작동한다. 다시 말해 둘 사이의 대비가 분명하더라도, 관객이 차이를 인지하도록 가속하지 않고 오히려 무신경하도록 유보하면서, 독립적 표현에 대한 작가의 기대를 지연했다. 이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일시적으로 분할/ 나열된 지도, 또는 하나의 맥락이 임의로 해체/ 조직된 인덱스의 방법을 암시한 것이다. 4)
두 세계를 하나의 풍경으로 묶는 전시 구성은 누군가의 예상에 부응했을까, 아니면 대랍했을까.
황용진의 회화가 하나의 이미지에 두 개 이상의 요소를 자제하며 서사의 개입을 배제하려는 설정 5)은, 이수진의 회화와 서로 반응하여 사유의 공간을 넓힐 계기를 마련한다. 전시는 이수진의 회화 또는 황용진의 회화와 마주하게 함으러써 수집한 이미지의 기존 서사와 또 다른 이야기 전개가 일어나도록 6) 분면히 했지만, 영화에서 분할된 장면의 연속이 또다시 오컬트적인 서사를 반복하는 상황과 (그의 예상보다) 일찍 마주한 것은 아닌가 싶다. 황용진은 '주인공이 사라진 무대'를, 이수진은 '무대에서 벗어난 주인공'을 그렸고, <명명된 겨울 없음>은 갤러리의 클리셰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전시라는 광의의 영역에서 회화에 대한 큐레이팅은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언제나 본래적인 미래, '앞선 거기'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자기 세계를 누군가의 삶과 부딪히면서 시간을 흐르게 해야 한다. 우선 현재를 진단하자면, 공간에 대한 관심이 범사회적으로 커졌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도시의 이동 반경이 제한되고, 마스크 때문에 숨쉬기 힘들어진 뉴노멀 일상을 생각한다 7)
이 시기를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지금은 공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변화는, 변해야 하는 시기이다. 회화가 실재하지만 부재하는 역설의 공간으로서 우리에게 또 다른 시선을 제안하는 방법이라면, 공간에 대한 시대적 인식의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는가.
/ 백필균
4)윤원화, [문서는 시간을 재/생상할 수 있는가], 2017 참조.
5) 황용진의 이전 작업이 대위법적인 사물-배경 관계를 화면에서 연출한 설정과 달리, 최근 작업은 회화적 표현에 의한 안식의 풍경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색체 스펙트럼이 좁은 풍경 이미지에서 나무의 잔가지들로 이뤄진 숲의 형상과 공기의 곁을 비정형적 마티에르로 재현한 동시에 회화의 물질과 행위를 현현했다.
6) 이수진은 색조와 구도가 보정되었을 영화 장면을 분할하여 긴장감을 드러내는 회화로 재전유(re-appropriation)했다. 이는 영상 기술로 가공된 이미지를 단순히 일상의 편린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공간'을 향한 창문 하나하나를 열어가는 회화적 실천과 관계있다.
7) 천 명 이상의 학생이 모이는 학교의 구조는 위함하다. 갑자기 집이 좁아 보인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은 고공 행진하는데 집은 언제 사나...